우리는 스포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극적인 명승부나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경기를 접하고 느끼는 바가 많아집니다. 외환 위기 당시 박세리 선수가 양말을 벗고 물 속에서 골프채를 휘두른 끝
에 우승을 한 장면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다시 뛰겠다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죠. 월드컵 때는 어땠습니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지 않았습니까. 또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을 놓고 기업이나 정부는 인재 활용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었죠.
저는 이번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벌어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보여준 극적인 명승부를 보면서 이번 시리즈를 스포츠 게임이라고만 생각할 수가 없었답니다. 혹시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말씀 드린다면 보스턴 레드삭스는 숙명적인 라이벌인 양키스를 맞아 먼저 세 게임을 내리 졌지만 나머지 네 게임을 연승해 거짓말 같은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런 일이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한국시간으로 10월20일에 열렸던 6차
전에서 보스턴의 투수 커트 실링이 보여준 역투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커트 실링, 희생의 대가
커트 실링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가로막아온 보스턴의 불행을 날려줄 우승 청부사로 올해 영입된 38세의 노장 투수죠. 보스턴이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제공한 연봉만도 138억 원이라고 하는군요. 실링은 1차전에서 뜻하지 않은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패전 투수가 되면서 자신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올 시즌 21승을 거둔 대투수에 우승의 기대를 걸었던 팬들을 실망시켰죠. 시리즈 전적 2승3패로 한번만 더 지게 되면 월드시리즈 진출을 할 수 없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실링은 선발 투수로 등판했습니다.
7이닝 동안 안타 4개를 맞고 한 점을 내준 실링의 역투는 그야말로 눈부셨습니다. 특히 실링은 이 경기를 앞두고 오른쪽 발목 근육을 꿰매는 수술까지도 받았다고 합니다. 경기 중에 카메라에 잡힌 그의 발목 부분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와 양말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빨간 양말 `레드 삭스’가 돼 있더군요. 발목을 절룩거리는 부상 투수가 그렇게 잘 던지는 광경을 저 역시 예전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링의 혈투에 힘입어 6차전을 잡은 보스턴은 7차전에서도 그동안 부진했던 선수들이 홈런을 치고 호투를 하면서 늘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아온 거함 양키스를 침몰시키고 말았습니다. 경기 해설자는 전날 실링이 보여준 노장의 투혼이 다른 선수들에게 미친 작용이 워낙 컸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실링의 혈투, 프로페셔널의 전형
반면 연봉만도 3백억원에 가까운 양키스의 `메이저리그 최고 몸값’ 알렉스 로드리게스 역시 올해 양키스의 확실한 우승을 위해 스카우트된 선수였지만 6차전 말미에 상대방의 수비를 고의로 방해하는 비신사적 행위를 한 바람에 팀의 추격 흐름을 끊어버렸습니다.
저는 커트 실링에게서 프로페셔널의 모습을 봤습니다. 팀과 팬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깨닫고 있었고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몸값을 제대로 해낸 것입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기업으로 옮겨봅시다. 기업에서도 메이저리그 수준은 아니지만 높은 연봉과 좋은 대우를 받고 스카우트된 사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사례 한 가지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유명 전자업체는 지난해 외국계 전자업체에서 마케팅 담당 임원 A씨를 스카우트했습니다. 능력만 보여준다면 최고 경영자 자리까지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 회사와 대주주의 입장이었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연봉, 보너스 패키지, 각종 예우 조건에서도 최상의 수준이 제공됐죠. 기존 임원들에 비해 5살 가량 젊은 그에게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스카우트 된 직장인, 커트 실링을 따라하자
그러나 A씨는 이직한 지 1년6개월을 넘긴 얼마 전 실적 저조를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습니다. A씨의 공과에 대해서는 회사와 A씨가 서로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이 많지만 어쨌든 실적 저조를 놓고는 할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회사가 A씨를 왜 영입했겠습니까?
그냥 두어도 어느 정도의 매출 증가를 이룰 수 있지만 좀더 그 속도와 폭을 키워보고 싶어 그를 영입했을텐
데 이런 의도가 먹혀들지 않은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실링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선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된 직장인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역사에 남을만한’, 적어도 `그 회사의 사보에 남을만한’ 그 무엇인가를 이뤄내야 프로입니다. 자신이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된 점을 어느 정도 감지한 직장 동료, 상사, 부하 직원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견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견제를 극복하는 방법 역시 뭔가 확실한 실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살길만 찾는 요즘, 직장인에게 희생의 의미는 값지다
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자신을 어느 정도는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링은 프로 선수입장에서는 생명과는 같은 몸을 던져가면서 자신의 명예를 지켜냈습니다. 기업에서도 외부에서 영입된 사람이 눈앞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그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차 이 칼럼을 통해 말씀드리지만 직장은 혼자 뛰는 곳이 아닙니다. 동료들과 함께 팀 플레이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피가 배어나온 실링의 양말을 보면서 다시 한번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