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연인"에 나오는 강태영은 '경력개발 지진아'다.
목적도 분명하지 않은 짧은 파리 유학, 자동차회사 사보팀에서 잠깐 일한 경력,
몇 번의 아르바이트, 현재 복합영화관 인턴사원....
요즘 모방송국의 주말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화제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의 뉴스들은 연일 이 드라마와 관련한 시시콜콜한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직장인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메신저의 ID도 이 드라마 대사들로 가득 차 있어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게다가 집 식구들의 협박성 강요까지도 겹쳐 필자 역시 채널을 '파리'에 고정하게 됐다.
몇 주를 지켜본 결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인물들은 개인 경력 컨설턴트의 눈으로 볼 '경력개발 지진아'들이다. 여주인공 강태영(김정은 분)은 더욱 그러하다. 이 드라마의 주시청자들이 한창 직업적 고민에 빠져있거나 진로 탐구중인 10-30대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드라마를 단순한 신데렐라, 캔디류의 만화 영화로만 볼 수 없다.
학교 수업이나 직장에서의 직무교육, 책 한권 보다도 이런 드라마가 개인 경력개발 과정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그냥 두고만 보기에는 직업적 책임감이 용서하지 않는다.
드라마 안으로 들어가 직업인 강태영을 보자. 강태영은 영화인이었던 아버지의 사망 이후 파리로 영화 공부를 하러 떠났었다. 가난한 영화학도인 그는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다 국내 유명 자동차 회사의 사장이자 재벌 2세인 한기주(박신양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도중 귀국한 강태영은 한기주의 도움으로 자동차회사 사보팀에 입사해 영화 관련 글을 잠깐 썼으며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거쳐 현재는 복합영화관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선 궁금한 점은 주인공의 직업적 꿈과 목표가 무엇인가이다. 주인공이 대학을 졸업했는지, 그리고 뭘 전공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프랑스어를 조금 구사하는데다 사보팀에서 영화 평을 쓸 정도라면 대학 졸업자라는 추측 정도는 해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영화 촬영감독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이끌려 영화 관련 일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는 알 길이 없다.
영화 공부를 위해 해외 유학까지 결행한 그의 열정은 체계적인 계획과 전략에 따라 발현되지 않는다. 로맨스로 인한 애정과 그에 따른 질투가 그의 직업적 삶을 바꿔놓고 만다. 물론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뭘 어떻게 해볼 수 조차 없을 것 같은 상황 설정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사회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을수록 직업인으로서의 목표 설정은 더욱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둘째, 시청자들은 강태영의 이력서를 한번 써볼 필요가 있다. 목적도 분명하지 않은 짧은 파리 유학, 자동차회사 사보팀에서 잠깐 일한 경력, 몇번의 아르바이트, 현재 복합영화관 인턴사원. 쾌활하고 포기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장점은 있지만 그의 경력 사항은 조각, 조각의 연결일 뿐이다. 어느 것 하나 기업에서 제대로 된 경력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보팀에서 영화 평을 쓴 경험을 살려 유사한 회사의 사보팀 직원이나 영화홍보대행사, 영화제작사의 마케터 혹은 기획자 같은 포지션에 지원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분명 받아줄 만한 회사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셋째, 강태영이 근무했던 자동차 회사의 문화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는 그런 직장은 없다. 시청자, 특히 구직자들은 착각하지 말라. 대표이사 사장이 여직원과 사내에서 개인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광경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여직원들의 화려한 옷차림은 현재 한국에 있는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도 본 바가 없다. 아무리 개인적인 친분이 있더라도 신입 직원이 그처럼 자유롭게 사장실을 드나들 수는 없다. 수평적 인간관계가 강조되는 요즘이라지만 엄연히 회사에서 직급이라는 것이 있고 상하질서라는 것도 있다. 시청자들이 혹시나 저런 분위기의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환상을 가질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넷째, 강태영처럼 개인적인 인연으로 취업을 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 태영처럼 평범한 여인이 재벌 2세 사장과 사랑에 빠질 확률이 로또 당첨 확률보다 낮다는 말도 있다. 개인적인 호감이 있는 여성을 자기 회사에 취직을 시키는 재벌 2세는 상상하기 어렵다. 재벌 2세의 전처가 또 그 여성을 자기 회사의 인턴으로 뽑아 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취업 과정에서 주변 지인들의 도움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낙하산'은 `글쎄요~'이다.
물론 드라마는 당연히 허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컨텐츠는 그럴 법하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정도의 설득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년 전 헤드헌팅 업계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장래 꿈을 헤드헌터로 설정한 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한의학 관련 드라마의 영향으로 한의학과 커트라인도 올라가고 직장인중에 늦깍이로 한의사가 되겠노라면서 회사를 그만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렇듯 인기 드라마 한편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런 점에서 '파리'의 여주인공이 앞으로 영화 관련 전문 직업인으로서 스스로의 경력을 어떻게 개발해나갈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애담뿐만 아니라 세상살이에 대한 드라마 작가들의 이해가 좀더 높아지길 더불어 바란다.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강태영을 찾아가서라도 경력개발의 목표를 찾아내고 그것을 이룰 전략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