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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영 대표] 정은임, 한국 방송계의 큰 손실

그의 죽음은 뭔가 낯섭니다. 얼마 전 제 애창곡 '곡예사의 첫사랑’의 가수 박경애씨가 투병 끝에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수 김광석씨가 세상을 버린 다음 날 저녁 노래방에서 친구가 세시간 동안 그의 노래를 부르며 애도했을 때도 이번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같은 방송국 김태희 아나운서의 죽음 때도 프로 바둑기사 유창혁씨의 부인이라는 점이 관심을 끌었지 이토록 추억 신경을 자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커리어닥터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게 왜 이리 아나운서의 죽음을 놓고 장황하게 시작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나운서 정은임은 언젠가 제가 경력개발에 대한 책을 쓰게 되면 꼭 사례로 들고 싶었던 사람이랍니다. 그가 누구인데 그의 죽음을 놓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을 테고 반대로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매니아적 팬들도 계시겠지요. 저는 그가 방송사에 입사하던 시절부터 그가 걸어가는 길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갑작스런 떠남이 생경할 수 밖에요.

정은임은 그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한국 방송 구조에서는 탄생하기 어려운 전략적 경력개발 경로를 밟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무기는 용기와 전문성, 그리고 열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영웅이 된다고 하지만 정은임의 짧은 방송 생활 중 알려진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싶습니다.

우선 그는 대중적 출세와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줬습니다. 방송사 수습 사원 시절 회사에서 요구한 노조가입 포기 각서를 거부하고 파업에 참여한 일화는 그 당시 언론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여성 아나운서들은 뉴스 앵커우먼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죠. 더욱이 방송사 파업에 참가한 백지연이라는 거물 앵커우먼의 빈 자리를 수습 아나운서에게 맡길 상황까지 벌어졌는데 말입니다.

심야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파업전야’를 특집으로 다루고 운동가요를 틀어주는가 하면 강제 철거를 비판하던 정은임의 용기는 무모하다 싶을 지경이었죠. 대학을 막 졸업한 신참 아나운서의 치기의 발로로 보는 시각도 있었죠. 그러나 그런 용기 덕분에 어느 아나운서도 가지지 못했던 팬 집단이 자생적으로 생기게 만들었고 그가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그만뒀을 때도 그의 복귀를 추진하는 한국 최초의 방송소비자 집단운동도 촉발케 했지요. 자신의 가치와 조직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그의 방송 삶은 '용기를 가지세요, 그러면 스스로 원하는 가치 속에서 성공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 합니다.

둘째 그는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를 지향했습니다. 한국 언론의 환경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잘할 수 있는 '모범생'을 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정은임은 영화 전달꾼의 한길을 달린 스페셜리스트이고자 했지요. 소녀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읽은 동서양의 고전을 접하면서 인문학적 교양의 위대함을 느꼈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극장을 드나들면서 영화에 빠져들었던 그였죠. 어느 잡지 기사를 보면 '인디애나 존스'를 보고 고고미술사학과를 지망했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본인이 원치 않게 영화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그만두게 된 이후에도 '주종목'을 바꾸는 시도를 하지 않았지요. 결혼 후 유학을 가서도 그는 영화에 매달렸죠. 귀국 후 결국 새벽 3시라는 방송 사각 시간에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다시 진행하게 됐습니다.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됐으며 자신이 어떤 소재에 관심이 있는지를 일찍이 파악했다는 점에서 그의 경력개발 성숙도는 평가받을 만 합니다. 요즘 `파리의 연인’에서 등장하는 '경력개발 지진아' 강태영이란 인물과는 대조가 되지요.

그가 사고를 당하지 않고 방송 생활을 계속해갈 경우 어떤 전문가적 전형을 스스로 만들어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열정과 용기'로 자신의 전문가형 경력개발을 진행중이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정은임이라는 아나운서의 존재 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또 그를 기억하는 것이 아날로그 시대 사람이라는 딱지를 준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출퇴근 길이나 사무실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미디어들이 연예, 스포츠 기사로 절반을 넘기고 나머지 기사들도 가십성 기사로 채우는 때에 대중 매체를 통해 좀더 진지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열정을 가진 또다른 정은임이 나타나길 바래봅니다.